강의명: 한문학의 이해

훈구파와 사림파의 문학적 대립

 

 

1. 훈구파

훈구라는 말은 원래 훈구공신(勳舊功臣)이나 훈구대신(勳舊大臣) 등 오랫동안 왕을 보필하면서 공을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가진 용어에서 왔다.
훈구파는 조선 건국과 초기의 중앙집권화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사람들에게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세조 때부터이다. 세조를 도와 왕위찬탈을 도모한 세력들이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왕의 교체와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근본적으로 교체되지 않고 성종 초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실권을 독점했다.

이들은 공신전과 과전, 농장 등을 통하여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소유했으며, 서로 간에 혼인을 맺거나 왕의 외척이 되거나 하면서 세습적인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 갔고, 관직은 이들 사이에서 세습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성종 7(1476)에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성종은 훈구세력의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김종직을 비롯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이 이른바 사림파이다.

 

2.사림파
사림파는 향촌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관리가 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들의 학맥은 고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에서부터 이어져 온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를 거쳐 다시 그 제자인 김종직, 그리고 그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에 치중했다. 경학의 기본 정신을 성리학에서 찾는다. 성리학을 학문으로 연구할 뿐더러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려 하면서 수기치인을 내세워 스스로의 도덕적 수양을 중시한다. 또한 공도(公道)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는 공론을 중시하고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꾀했다.
사림파는 왕에게 성군을 본받도록 요구했고 관리에게 도덕적 수양을 쌓은 군자가 되기를 요구했다. 또한 백성을 향약으로 교화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 즉 유교 도덕이 구현되는 이상국가를 이루려 했다.

 

3. 훈구의 문학적 성향

훈구 또는 관학파라고 불린다. 관학파는 주로 성균관 출신들이 많다, 이들은 개혁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들이 조선을 건국한 급진주의 신진사대부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군을 중시여기고 기술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기술이 많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군이라는 민족의 시초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이론은 단결력을 만들어 줘 자주적인 성향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문학을 문학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문학의 쓰임을 강조하는 사장을 강조했다.

이들은 주로 중앙관료들로 관료적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관각문학이 주로 나타난다.

 

<관각문학>

중앙관료들이 이끌어간 관학파 문학은 고려 말의 관료적 경향을 이었는데, 詞章派(사장파) 문학이라고도 한다. 관학파 문인은 나라를 빛내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관인문학에서는 문학의 의의가 經世致用에 있다고 보고 훌륭한 문장을 가지고 국정과 외교에 참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관각문학은 보수적, 문학 장식적, 화려함, 격식적, 한시 중심의 문학이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권근, 서거정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인물들로 이른바 신진사대부 층이다. 이 문인학자들은 자기들이 정치현실을 새롭게 개혁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4.사림의 문학적 성향

사림파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이들은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중요시 하고 기술을 천시했다. 또 경학을 중요시하며 타사상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실학이 배척된 이유와 소격서(국가적 단위로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폐지된 것을 예로 들 수있다.

 

<사림문학>

지방의 사대부로서 도학이 문학의 근본임을 주장했다 이들은 문학이란 오로지 덕행과 학문에 의한 내적인 자기완성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성리학에서 나온 내용으로 성리학에서는 실천하는 가운데 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내부에 기가 확충 될 때 비로소 올바른 문학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림문학은 산림처사, 자기 성찰 구실, 표현보다는 흥취 중시. 시조 ,가사 중심이다. 사림파의 문학론은 문학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고 기교에 치중하던 사장파의 문학 경향에 비한다면 참신하고 진지한 것이나 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해 규범성, 보편지향성과 같은 역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림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길재,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등이 있다.

 

5.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유와 문학적 대립

1) 대립이유

훈구와 사림은 처음부터 엇나간 세력이기도 하지만 훈구가 권력을 잡고 정착하면서 여러 가지 남용을 저질렀다. 세조이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훈구들이 과전낭비와 점차 도태되어 간다. 또한 이후 왕권교체와 수렴청정을 통해 약해진 왕권을 이들의 세력이 위협하기에 이르자 성종은 사림을 중앙 정치로 이끌어 낸다.

사림은 훈구의 도태를 비판하며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으로 기존세력을 비판할 시흥세력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대립하게 되는 이유는 필연적 역사의 과정으로 보여 진다.

 

2) 문학적 대립

훈구는 시, 시문 중심인 사장을 중요시한다. 반면에 사림은 경전을 중시하며 사장은 천히 여긴다. 이들이 서로 융화 될 수 없었던 이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런 문학적 배경도 크게 작용된 것으로 보여 진다. 훈구는 개방적 성격이라 그래도 경전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만 사림은 다르다. 사림은 사서와 오경을 중시하고 시. 시문은 천하게 여긴다. 이는 이들의 생활모습에도 보여 진다. 조선초기에는 기술을 다루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는 나라를 강병하게 하고 자주적으로 지키고자함을 보여주는 훈구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기술을 천시하고 사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훈구가 보이는 자주성은 쇠퇴하게 된다. 또한 문학이 중국에 따라 사대주의적인 성격이 크게 나타난다.

 

6. 시대에 따른 훈구와 사림의 변화

조선시대 시기구분 방법에는 전후기 이분법과 전기중기후기 삼분법이 있다. 후기의 경우 말기의 구분을 더 두어 4분법적 구분을 설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조선시대 시기 구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조선시대 시기구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조선시대를 보는 시각이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이중 삼분법 설에 입각해 훈구 사림을 분석하고자 한다.

조선전기는 왕조교체기와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조교체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교체되는 시기로 신진사대부들의 관각문학을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시기이다. 신진사대부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는데 이들은 각각 훈구와 사림의 시초가 된다.

급진파는 조선건립을 도운 급진주의 신진사대부로 이들이 조선전기를 주도하는 훈구파의 시초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들이 훈구파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조반정 이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면서이다. 이들은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면서 공신전과 과전, 농장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불렸다.

온건파는 조선왕조를 반대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인 정몽주가 있는 세력이다. 이들은 대다수 조선건립이 되면서 죽음을 당했지만, 일부 살아남은 이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제자를 양성하면서 지지기반을 만들었다.

사림의 등장 시기는 성종시대부터이다. 성종이 7년에 세조비의 수렴청점에서 성종의 친정으로 바뀌면서 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훈구의 세력을 억누를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김종석을 필두로 한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조선중기에 들어서 사림들의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 이유로는 2가지가 있다. 사림들은 서원을 바탕으로 된 중소지주층이기에 훈구보다 세력권이 다양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끈임없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인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주로 사림의 문학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이들 반대하는 실학이 등장했다.

 

7.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 및 문학

 

인물 < 서거정, 1420 ~ 1488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강중이다. 그리고 호는 사가정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이후 문물제도의 완성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향약집성방을 국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해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사가집저서에동인시화》《동문선》《력대년표》《태평한화》《필원잡기》《골계전이 있으며 글씨에는화산군권근신도비(충주)가 있다. 대구 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학 < 獨 坐 독 좌 >

獨坐無來客 찾아올 손 없이 홀로 앉아 있자니

空庭雨氣昏 금새 비 오려나 빈 뜰은 침침하네

魚搖荷葉動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 움직이고

鵲踏樹梢飜 까치가 밟았나 흔들리는 나뭇가지

琴潤絃猶響 거문고는 젖었어도 줄은 울려지고

爐寒火尙存 화로는 싸늘해도 불씨는 남아있네

泥途妨出入 진창이 나들이길 가로막고 있으니

終日可關門 종일 문을 닫아 걸고 있을 수밖에

 

작품분석> 일견 속세를 떠나 칩거하고 있는 은사의 유유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인 듯하지만, 속사정을 따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찾아오는 손님 없이 혼자 앉아있다는 1구는 아무도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는 체념과, 그래도 혹시 누군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다림의 마음이 뒤섞인 모순된 심리상태를 보여 준다. 3, 4구에서 시인의 시선은 물고기가 흔들어 움직이는 연잎의 살랑거림, 까치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나뭇가지의 일렁거림을 포착하고 있다. 주변의 사소한 변화도 민감하게 포착하는 그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변화에 대한 그의 강렬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4구는 시인이 매우 고독할 뿐만 아니라 권태롭고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5, 6구를 살펴보면 이번에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눅눅한 거문고와 싸늘하게 식은 화로가 등장한다. 소리가 안 나는 거문고와 불씨가 꺼진 화로는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소리가 안 날 줄 알았는데 소리가 나고, 불씨가 없을 줄 알았는데 불씨가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가 없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쓸모를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거문고와 화로의 원 관념은 비로 시인 자신인 것을 알 수 있겠다. 시인은 결국 지금 세상이 쓸모없다고 자신을 버려도, 나는 아직 가슴 속에 정국제시에의 포부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비로소 7, 8구의 문맥이 소연해진다. 진흙탕 길이 정상적인 출입을 가로막고 있으니 나가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있겠노라는 것이다. 진흙탕 길은 곧 뜻있는 인사로 하여금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펼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제한하는 현실의 상황을 말한다. 그가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홀로 앉아 있음"의 참 의미는 하수상한 시절에 때를 기다리는 오롯한 몸가짐과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8.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및 문학

 

인물 <김종직, 1431 ~ 1492 >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 효관(). 시호는 문충. 경남 밀양 출생.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을 사관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김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미필재집, 저서에류두유록》《청구풍아)》《당후일기등이 있고, 편서에동문수》《일선지》《이존록등이 있다.

 

문학 < 寶泉灘卽事 보천탄즉사 >

桃花浪高幾尺許 복사꽃 뜬 냇물 얼마나 불었는고,

狠石沒頂不知處 솟은 바위 아주 묻혀 짐작 어려워.

兩兩玆鳥失舊磯 쌍쌍의 가마우지 옛 터전 잃어,

啣魚却入菰蒲去 물고기 입에 문 채 풀 섶에 드네.

 

작품분석> 점필재집에 나와 있는 칠언절구의 한시로 전2수 중 첫째 수이다. 1행에서의 냇물은 역사의 흐름을 의미하고 냇물이 불었음은 역사의 격랑기를 의미하고 있다. 2행에서 바위가 냇물에 묻힘은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는 여러 사건과 인물들을 표현한 것이다. 3행에서는 상황의 변화 속에서 터전을 잃은 가마우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가마우지는 작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4행에는 가마우지의 인고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 작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1, 2행에서는 냇물이 불고, 바위가 묻히는 상황의 변화(시류의 변화)를 부각시킨 후, 3행에서는 그와 같은 변화 속에서 가마우지가 삶의 터전을 잃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4행에서 물고기를 입에 문 채 풀섶에 든다고 함으로써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삶을 인고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마우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 시는 시류의 급격한 변화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선비의 곧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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