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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통해본 현실

2015. 2. 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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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의 이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젊은 여성은 왜 스타벅스에 열광하는가.)

 

최근 귀국한 날 공항세관을 통과한 이후 바로 보인 가게는 스타벅스였다. 인천공항 세관검사구역은 문 하나를 사이로 입국심사와 물품검사를 한다. 때문에 문 안에는 막 입국한 여행객으로 그리고 문밖에는 그들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런 지리적인 요충지를 점유하려면 여러 가지 사항들이 고려된다. 엄청난 임대료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 임대료를 해결하고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대중적이고 그만큼의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을 선정된다. 현재 그곳을 스타벅스가 차지하고 있단 것은 스타벅스커피가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스타벅스의 주 고객층, 이와 같은 소비를 주도하는 계층은 누구일까? 이는 한국시장에서 스타벅스의 시작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스타벅스 시작, 스타벅스 1호점은 이화여자대학교(이하이대’)에 앞에 있는 스타벅스 이대점이다. 1999년에 개점을 한 이후 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이대 상권은 홍익대학(이하 홍대’) 상권과 함께 패션과 문화의 메카로서 젊은 층의 소비코드를 대변해주는 곳이다. 이대 상권과 홍대 상권의 차이점을 두자면 이대는 젊은 여성들이 소비층의 주요 대상이고 홍대는 젊은 예술인들이 주요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스타벅스의 주요 소비층은 젊은 여성이란 점을 예측가능하게 한다.

젊은 여성들은 왜 스타버스에 열광 하는가? 대다수는 커피의 맛과 질때문이라고 답한다. 좋은 원두를 사용하는 만큼 커피의 맛이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자면 반면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믹스 커피에 열광한다. 저 품종의 원두로 최상의 맛을 낸다는 평가이다. 인터넷에 외국인 커피믹스 떡실신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면 다양한 인종, 나이, 성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믹스 커피를 극찬하는 동영상이 나온다, 그리고 한 유명 바리스타도 이 믹스 커피를 최고의 커피라고 찬사할 만큼 맛이 좋다. 즉 질과 커피의 맛은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소비이다. 스타벅스 안에서는 자신만의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고 남들과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가 반영되어 그 장소를 소비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이 스타벅스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고, 거칠게 말하면 그들이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빠져서 합리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소비를 서슴지 않고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MBC 뉴스 후 141회에 나온 스타벅스 3800원짜리 카페라떼 가격에 대한 분석을 보면 원재료, 임대료, 인건비, 감가상각, 로얄티 다 합해서 2800원이고 나머지 1000원은 이윤이다. 이익률 25%. 기본 식당의 이익률 6.5%보다 무려 4배나 챙긴다는 말이 된다. 구매력지수를 두고 비교해본 스타벅스 커피 국제가격차 분석에서 우리나라가 일본, 미국, 독일, 영국보다 훨씬 비싸게 커피를 팔고 있다고 나왔다. 독일보다 4배 이상 비싸다. 한국의 커피가 얼마나 과소비적 성향을 띄는 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스타벅스의 향기롭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려고 하는 여성들의 의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이미지를 가꾸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여성이 더 현대적 여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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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속의 자기만족

<김인숙> 작가론

 

 

1, 혼자 산다, - ‘1인용전성시대

우리나라는 과거에 대가족 중심의 가족사회였다. 3대가 함께하는 것은 기본이고 4,5대가 함께 사는 집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벼농사를 중시하는 농경사회였기에 가족의 수는 부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현대사회에 기계로 자동화된 농업문화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이웃과 서로 협동하고 상부상조하는 민족정신이 발달했으며 두레, 울력, 품앗이, 계 등의 민족문화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과학의 발달로 인해 농경사회가 붕괴되고 산업사회가 들어서면서 이런 가족 문화도 같이 붕괴되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가족유형이 변화하였으며 심지어 11가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통계청에 발표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이 23.9%로 나타났다. 즉 현재 4가구 중에 한 가구는 ‘11가구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통계청은 오는 2020년에는 29.6%, 2030년에는 32.7%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해 앞으로 이런 유형의 가구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이련 유형의 가구를 우리는 싱글족이라고 지칭한다. 이들 싱글족은 자신이 스스로 원하여 된 이들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존재한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급격한 경제발전에 대한 후유증으로 싱글족세대가 등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 가족의 분화로 생성된 독거노인형 싱글족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대가 산업화 되면서 많은 젊은 층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였다. 이때 젊은 층은 도시로 이동하였지만 대다수의 중·장년층은 농촌에 그대로 남았고 이들 중에 배우자 한쪽이 사망하면서 싱글족이 된 경우이다. 두 번째는 삼포세대(三抛世代)의 등장이다. 삼포세대는 11년도 경향신문에 최초로 사용된 말로 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용의 지출 등의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층 세대를 뜻한다. 이 두 가지 경우의 싱글족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싱글족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사회에게 소통할 기회를 빼앗긴 이들인 것이다.

김인숙 작가의 소통은 이런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다. 그녀가 말하는 소통이란 일종의 자기위로이자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김인숙 작가의 과거 경력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김인숙 작가는 연세대 신문방속하과를 졸업한 과거 경력이 존재한다. 신문방속학과는 현장실무를 중심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배운다. 때문에 기자로 활동했거나 신문방속학과를 졸업한 작가들의 경우 시대적 상황에 민감하거나 그것에 대해 담으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차상위 계층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한 조세희작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웰작가가 이 유형에 해당된다. 김인숙 작가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관계에서 어떤 형식으로 소통하는지를 통해 작품에서 그 시대를 담고 있다.

 

2, 관계되는 삶- 타자의 수용

김인숙 작가의 소통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작품에 주체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대화를 할 때 말을 이끌어가는 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를 제대로 파악해야 말에 대한 요지를 이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하는 뜻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통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 전에 주체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보통대화를 할 때 주체는 타자로도 분류된다. 그러나 김인숙 작가의 주체는 타인으로 주체를 분류하기 이전에 우리로도 분류한다. 이는 김인숙 작가의 소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된다. 특히 이점은 작가가 삶을 보여주는 단편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상실의 계절><함께 걷는 길>이다.

<상실의 계절>은 김인숙 작가의 등단작으로 20대의 김인숙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당시 시대적인 배경과는 동 떨어진 글이라는 비평을 받았으나, ‘20대 김인숙의 확고한 내면의 상태를 이 작품보다 잘 보여주는 글은 없다고 생각한다. <상실의 계절>에서 작가는 여성과 남성의 기준을 두고 여성을 로써 남성을 타자로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때 는 절대 우리로서 변화하지 않는다. 때문에 <상실에 계절>에서 타자이야기 하는 결혼은 자아의 상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부분은 젊은 날의 당돌한 김인숙과 묘하게 닮아 있다.

당시 그녀는 여대생 작가로 화려하게 등장해 매스컴의 유명세를 탔다. 일류대학의 신방과 여대생 작가,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그녀 한 인터뷰에서 등단을 하고 매우 힘들었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문학보다는 문학 외적인 데 대한 사람들이 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달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깊이 고심하던 여대생 작가는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통속적인 글쓰기보다는 사회의 시대를 자신의 글에 담고자 하였다. 초기에 그녀의 주체구분은 통속적이 것과는 다르고자 했던 그녀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반면 <함께 걷는 길>에서는 주체를 그리고 우리로 인식한다. <함께 걷는 길> 격동기의 학생운동사, 노동현장 체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을 그린 이야기 이다. 이전의 <상실의 계절>에서의 김인숙 작가의 여대생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면 <함께 걷는 길>에서는 작가로써의 김인숙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런 변화는 타자의 타자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타자를 수용하는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자신과 뜻이 맞는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그 타자와 소통하는 연결고리를 만들고 단체를 만든다. 그리고 그 단체를 통해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타자, 즉 시대에 부조리와 맞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런 방향으로 볼 때 주체의 수용은 김인숙이 자신이라는 몸에 시대라는 옷을 입어 그 시대를 항변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3. 나만의 삶 고독의 필요성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김인숙 작가가 초기에는 모든 타인을 거부하며 로써 존재하고자 했다면 최근의 그녀는 타인을 인정하지만 나만의 공간을 유지함으로 통해 거리두기를 만든다.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의 대표적으로 <소현><빈집>이 있다.

<소현>에서 작가는 조선과 청 모두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주인공 소현세자를 통해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소현세자에 대한 과거기록은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소현세자가 청에서 거주했던 심양관이 어느 곳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처럼 소현세자에 관한 과거기록은 인조시대 말살되었나, 극히 일부만 청나라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때문에 작가는 소현이라는 인물을 역사를 통해 파악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소현>을 출판하고 썼던 작가 말이나 인터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김인숙 작가는 마지막 파일을 닫아야 할 순간에 이르니, 또 미치겠다. 소현이 내게 말을 걸어서가 아니라 내게 여전히 소현에게 걸고 싶은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내내 소현의 고독이 내 몸속에 들어와 늘 어딘가가 아팠다 등의 대답으로 소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바 있다, 그리고 이 말에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진실은 바로 작가=소현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소현세자가 느꼈던 고독은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작가자신 또한 느껴보았던 고독이라는 시사점을 줄 수 있다.

1인 가구가 등장하며 홀로 살아가는 삶.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삶이다. 혼자식당을 가거나 혼자영화를 보는 등의 생활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진기한 현상이 아니다. 누구든 한번쯤 이런 행동을 하가나 주변을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자유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서로 소통의 단절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의견을 내어 사이를 좁혀가기보다는 나만의 공간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이 만든 하나의 문화현상. 이 문화현상이 만들어낸 시간은 좋게 말하면 개인적 시간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외톨이가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김인숙 작가가 말하고자한 소현세자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고독으로 버려진 현대인의 자신의 자화상이지는 않을까생각해본다.

앞서 고독이 <소현>이 고독이 시사하는 바를 말하고자 했다면 <빈집>고독의 필요성을 논하는 작품이다. <빈집>에서 여자와 그녀의 남편은 각기 다른 그들만의 비밀스런 공간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표면적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간이며 타인과 관계를 하며 살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이것을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가면에 공간이 아닌 가면(persona)에 비대어 설명한다. 가면심리학 또는 페르소냐(persona)심리학으로 불리는 그리스 고대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통해 설명한다, 인간은 천개의 페르소냐(가면)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냐를 사용해 상호 관계를 간다. 또한 페르소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간의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는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하게 된다. 김인숙 작가의 <빈집>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외향적인 소요로 합일을 이루는 페르소냐 심리학과는 다르게 <빈집>의 시각은 외향과 내면의 분단으로 향한다,

<빈집>에서 개인적 공간은 사회를 살아가는 주인공들과 절대 합일되지 않는다. 남편은 온순했던 외향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공간에서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자신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의 공간은 의외로 간소한 것을 추구한다. , ‘극과 극상반된 것이 외면과 내면에 각각 깃들어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앞서 말한 페르소냐 심리학보다 김인숙 작가의 개인적 공간이 더욱 현실성 있게 와 닿는다, 이는 사회가 계속 사람들에게 맞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포세대이다. 앞서 말한 삼포세대는 어쩔 수 없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였다면 이번에 망한 삼포세대는 자의에 의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발현은 공동체 주의적인 사회의 자신만의 공간을 원하는 자들의 발악이다.

 

4. 김인숙이 본 현대사회

김인숙 작가는 긴 공백 기간 없이 작품 활동을 한 중년 작가이다. 그녀의 가장 긴 공백 기간은 그녀가 호주로 넘어가 자녀를 교육하였을 당시 3년이다. 그 공백 기간에도 <먼길><시드니, 푸른 바다에 서다>등의 작품을 집필하여 공백 기간으로 보기도 애매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그녀는 책으로 된 소통뿐만 아니라 방송이나 신문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끈임 없이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글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20세기 김인숙 작가가 중시한 키워드는 고독이다. 그녀는 이제 50대를 넘은 나이로 여자로써의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그것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없지만, 이대 여성들은 많은 고독감을 느낀다고 한다. 폐경기는 자신의 여성성에 대한 상실을 통해 그 누구과도 공유할 수 없는 고독감을 가지는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극복함을 통해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누군가의 어머니로써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김인숙 작가가 고독을 인정하고 그것에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함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을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의 고독을 수용한 자에게 고독이란 더 이상 외로움만이 아닌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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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명: 한문학의 이해

훈구파와 사림파의 문학적 대립

 

 

1. 훈구파

훈구라는 말은 원래 훈구공신(勳舊功臣)이나 훈구대신(勳舊大臣) 등 오랫동안 왕을 보필하면서 공을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가진 용어에서 왔다.
훈구파는 조선 건국과 초기의 중앙집권화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사람들에게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세조 때부터이다. 세조를 도와 왕위찬탈을 도모한 세력들이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왕의 교체와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근본적으로 교체되지 않고 성종 초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실권을 독점했다.

이들은 공신전과 과전, 농장 등을 통하여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소유했으며, 서로 간에 혼인을 맺거나 왕의 외척이 되거나 하면서 세습적인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 갔고, 관직은 이들 사이에서 세습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성종 7(1476)에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성종은 훈구세력의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김종직을 비롯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이 이른바 사림파이다.

 

2.사림파
사림파는 향촌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관리가 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들의 학맥은 고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에서부터 이어져 온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를 거쳐 다시 그 제자인 김종직, 그리고 그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에 치중했다. 경학의 기본 정신을 성리학에서 찾는다. 성리학을 학문으로 연구할 뿐더러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려 하면서 수기치인을 내세워 스스로의 도덕적 수양을 중시한다. 또한 공도(公道)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는 공론을 중시하고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꾀했다.
사림파는 왕에게 성군을 본받도록 요구했고 관리에게 도덕적 수양을 쌓은 군자가 되기를 요구했다. 또한 백성을 향약으로 교화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 즉 유교 도덕이 구현되는 이상국가를 이루려 했다.

 

3. 훈구의 문학적 성향

훈구 또는 관학파라고 불린다. 관학파는 주로 성균관 출신들이 많다, 이들은 개혁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들이 조선을 건국한 급진주의 신진사대부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군을 중시여기고 기술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기술이 많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군이라는 민족의 시초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이론은 단결력을 만들어 줘 자주적인 성향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문학을 문학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문학의 쓰임을 강조하는 사장을 강조했다.

이들은 주로 중앙관료들로 관료적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관각문학이 주로 나타난다.

 

<관각문학>

중앙관료들이 이끌어간 관학파 문학은 고려 말의 관료적 경향을 이었는데, 詞章派(사장파) 문학이라고도 한다. 관학파 문인은 나라를 빛내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관인문학에서는 문학의 의의가 經世致用에 있다고 보고 훌륭한 문장을 가지고 국정과 외교에 참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관각문학은 보수적, 문학 장식적, 화려함, 격식적, 한시 중심의 문학이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권근, 서거정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인물들로 이른바 신진사대부 층이다. 이 문인학자들은 자기들이 정치현실을 새롭게 개혁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4.사림의 문학적 성향

사림파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이들은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중요시 하고 기술을 천시했다. 또 경학을 중요시하며 타사상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실학이 배척된 이유와 소격서(국가적 단위로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폐지된 것을 예로 들 수있다.

 

<사림문학>

지방의 사대부로서 도학이 문학의 근본임을 주장했다 이들은 문학이란 오로지 덕행과 학문에 의한 내적인 자기완성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성리학에서 나온 내용으로 성리학에서는 실천하는 가운데 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내부에 기가 확충 될 때 비로소 올바른 문학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림문학은 산림처사, 자기 성찰 구실, 표현보다는 흥취 중시. 시조 ,가사 중심이다. 사림파의 문학론은 문학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고 기교에 치중하던 사장파의 문학 경향에 비한다면 참신하고 진지한 것이나 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해 규범성, 보편지향성과 같은 역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림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길재,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등이 있다.

 

5.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유와 문학적 대립

1) 대립이유

훈구와 사림은 처음부터 엇나간 세력이기도 하지만 훈구가 권력을 잡고 정착하면서 여러 가지 남용을 저질렀다. 세조이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훈구들이 과전낭비와 점차 도태되어 간다. 또한 이후 왕권교체와 수렴청정을 통해 약해진 왕권을 이들의 세력이 위협하기에 이르자 성종은 사림을 중앙 정치로 이끌어 낸다.

사림은 훈구의 도태를 비판하며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으로 기존세력을 비판할 시흥세력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대립하게 되는 이유는 필연적 역사의 과정으로 보여 진다.

 

2) 문학적 대립

훈구는 시, 시문 중심인 사장을 중요시한다. 반면에 사림은 경전을 중시하며 사장은 천히 여긴다. 이들이 서로 융화 될 수 없었던 이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런 문학적 배경도 크게 작용된 것으로 보여 진다. 훈구는 개방적 성격이라 그래도 경전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만 사림은 다르다. 사림은 사서와 오경을 중시하고 시. 시문은 천하게 여긴다. 이는 이들의 생활모습에도 보여 진다. 조선초기에는 기술을 다루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는 나라를 강병하게 하고 자주적으로 지키고자함을 보여주는 훈구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기술을 천시하고 사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훈구가 보이는 자주성은 쇠퇴하게 된다. 또한 문학이 중국에 따라 사대주의적인 성격이 크게 나타난다.

 

6. 시대에 따른 훈구와 사림의 변화

조선시대 시기구분 방법에는 전후기 이분법과 전기중기후기 삼분법이 있다. 후기의 경우 말기의 구분을 더 두어 4분법적 구분을 설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조선시대 시기 구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조선시대 시기구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조선시대를 보는 시각이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이중 삼분법 설에 입각해 훈구 사림을 분석하고자 한다.

조선전기는 왕조교체기와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조교체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교체되는 시기로 신진사대부들의 관각문학을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시기이다. 신진사대부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는데 이들은 각각 훈구와 사림의 시초가 된다.

급진파는 조선건립을 도운 급진주의 신진사대부로 이들이 조선전기를 주도하는 훈구파의 시초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들이 훈구파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조반정 이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면서이다. 이들은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면서 공신전과 과전, 농장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불렸다.

온건파는 조선왕조를 반대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인 정몽주가 있는 세력이다. 이들은 대다수 조선건립이 되면서 죽음을 당했지만, 일부 살아남은 이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제자를 양성하면서 지지기반을 만들었다.

사림의 등장 시기는 성종시대부터이다. 성종이 7년에 세조비의 수렴청점에서 성종의 친정으로 바뀌면서 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훈구의 세력을 억누를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김종석을 필두로 한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조선중기에 들어서 사림들의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 이유로는 2가지가 있다. 사림들은 서원을 바탕으로 된 중소지주층이기에 훈구보다 세력권이 다양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끈임없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인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주로 사림의 문학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이들 반대하는 실학이 등장했다.

 

7.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 및 문학

 

인물 < 서거정, 1420 ~ 1488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강중이다. 그리고 호는 사가정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이후 문물제도의 완성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향약집성방을 국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해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사가집저서에동인시화》《동문선》《력대년표》《태평한화》《필원잡기》《골계전이 있으며 글씨에는화산군권근신도비(충주)가 있다. 대구 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학 < 獨 坐 독 좌 >

獨坐無來客 찾아올 손 없이 홀로 앉아 있자니

空庭雨氣昏 금새 비 오려나 빈 뜰은 침침하네

魚搖荷葉動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 움직이고

鵲踏樹梢飜 까치가 밟았나 흔들리는 나뭇가지

琴潤絃猶響 거문고는 젖었어도 줄은 울려지고

爐寒火尙存 화로는 싸늘해도 불씨는 남아있네

泥途妨出入 진창이 나들이길 가로막고 있으니

終日可關門 종일 문을 닫아 걸고 있을 수밖에

 

작품분석> 일견 속세를 떠나 칩거하고 있는 은사의 유유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인 듯하지만, 속사정을 따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찾아오는 손님 없이 혼자 앉아있다는 1구는 아무도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는 체념과, 그래도 혹시 누군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다림의 마음이 뒤섞인 모순된 심리상태를 보여 준다. 3, 4구에서 시인의 시선은 물고기가 흔들어 움직이는 연잎의 살랑거림, 까치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나뭇가지의 일렁거림을 포착하고 있다. 주변의 사소한 변화도 민감하게 포착하는 그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변화에 대한 그의 강렬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4구는 시인이 매우 고독할 뿐만 아니라 권태롭고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5, 6구를 살펴보면 이번에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눅눅한 거문고와 싸늘하게 식은 화로가 등장한다. 소리가 안 나는 거문고와 불씨가 꺼진 화로는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소리가 안 날 줄 알았는데 소리가 나고, 불씨가 없을 줄 알았는데 불씨가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가 없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쓸모를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거문고와 화로의 원 관념은 비로 시인 자신인 것을 알 수 있겠다. 시인은 결국 지금 세상이 쓸모없다고 자신을 버려도, 나는 아직 가슴 속에 정국제시에의 포부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비로소 7, 8구의 문맥이 소연해진다. 진흙탕 길이 정상적인 출입을 가로막고 있으니 나가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있겠노라는 것이다. 진흙탕 길은 곧 뜻있는 인사로 하여금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펼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제한하는 현실의 상황을 말한다. 그가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홀로 앉아 있음"의 참 의미는 하수상한 시절에 때를 기다리는 오롯한 몸가짐과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8.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및 문학

 

인물 <김종직, 1431 ~ 1492 >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 효관(). 시호는 문충. 경남 밀양 출생.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을 사관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김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미필재집, 저서에류두유록》《청구풍아)》《당후일기등이 있고, 편서에동문수》《일선지》《이존록등이 있다.

 

문학 < 寶泉灘卽事 보천탄즉사 >

桃花浪高幾尺許 복사꽃 뜬 냇물 얼마나 불었는고,

狠石沒頂不知處 솟은 바위 아주 묻혀 짐작 어려워.

兩兩玆鳥失舊磯 쌍쌍의 가마우지 옛 터전 잃어,

啣魚却入菰蒲去 물고기 입에 문 채 풀 섶에 드네.

 

작품분석> 점필재집에 나와 있는 칠언절구의 한시로 전2수 중 첫째 수이다. 1행에서의 냇물은 역사의 흐름을 의미하고 냇물이 불었음은 역사의 격랑기를 의미하고 있다. 2행에서 바위가 냇물에 묻힘은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는 여러 사건과 인물들을 표현한 것이다. 3행에서는 상황의 변화 속에서 터전을 잃은 가마우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가마우지는 작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4행에는 가마우지의 인고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 작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1, 2행에서는 냇물이 불고, 바위가 묻히는 상황의 변화(시류의 변화)를 부각시킨 후, 3행에서는 그와 같은 변화 속에서 가마우지가 삶의 터전을 잃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4행에서 물고기를 입에 문 채 풀섶에 든다고 함으로써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삶을 인고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마우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 시는 시류의 급격한 변화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선비의 곧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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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필의 이해

尹春年 上疎(윤춘년 상소)

 

1) ‘상소?

윤춘년의 상소에 말하기에 앞서 상소, 올리다 상()자에 트다. 통하다 소()자를 사용하는 상소문에 대하서 알아야 한다. 상소문은 임금과 신하가 말을 통하게 하는 하나의 글 형식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글쓰기로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문서와 비슷하다. 상소의 기원은 보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나라 이전에 상서(上書)라 불리고 진나라 때는 주()라 하고, ()나라에 이르러서는 장(·(()로 세분하였다. 그 이후 주의(奏議주소(奏疏) 등의 이름을 붙여졌고 이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상소와 상주가 되었다,

상주와 상소는 두 경우 모두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상소는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청하는 글이고, 상주는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건의사항을 적은 글이다, 즉 상소는 일종의 호소문이라면 상주는 일종의 청유문이나 제안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최고 권력자인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충··의를 굉장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효 그리고 충이라 불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소는 이런 조선시대 사회에서 일종의 위계질서를 위배할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득권층인 양반들은 이 문제를 고서의 인물들에 대한 행동을 비유하거나 고서를 인용해 해결하였다. 유교의 중요경전인 사서삼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앞선 전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왕의 행동을 비판했다.

 

2) ‘윤춘년은 누구인가?

윤춘년(1514 ~ 156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창주(滄洲). 계겸(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안인(安仁)이다. 조선 중기 문신 학자로 대표적인 글로는 학음고學音稿가 있다.

1534(중종29) 생원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이후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다가 1545(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에게 가담하여 대윤일파의 제거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을 숙청하였다. 다음해에는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 제거에 윤원형의 독주체재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계기로 윤원형의 총애를 받게 되고 이후 급속히 출세하게 하여 이조정랑·장령·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됐다. 그러나 2년 뒤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공박하지 못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1558년 동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565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윤원형이 실각되자 파직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사관은 그를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대학자로 자처하는 등 공명심은 많았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였다고 하며 청백리로 알려지기도 하다라 기록했다.

인간의 실수는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정당싸움은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현실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왕과 신하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왕과 정당과 정당의 삼파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춘년은 이러한 당파싸움의 절정기인 중종과 명종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우리나라는 선비들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이란 의미를 갖는 사화가 총 4번에 걸쳐 존재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이중 두 번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났으며 나머지 두 번은 중종과 명종시대에 일어났다. 특히 윤춘년의 상소문은 역사상으로 을사사화의 시발점으로 뽑힌다. 이러한 배경으로 윤춘년이 살아간 시대를 바라보면 그는 제대로 당파에 붙지 못하면 죽으며, 남의 당파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시대에 살아갔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윤춘년을 바라보면 그의 글은 절대 비굴한 글쓰기만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글은 이간질을 위한 글이라고 보기보다는 그의 글은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3)‘윤춘년 상소내용

명종에게 윤원로를 탄핵할 것을 요구하는 글이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 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문정황후가 인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돌았다. 윤춘년은 이를 윤임과 윤원로의 거짓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죄를 물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여기서 윤원로는 윤춘년이 담고 있는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의 형이다. 당시 정세를 보면 당파는 대윤과 소윤으로 또 소윤은 윤원로와 윤원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때문에 대윤이 지지하던 인종이 죽었음에도 소윤이 대윤을 축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소윤의 구심점을 윤원형에게 몰아주며 대윤을 축출하는 시발점을 마련해줬다.

 

4) 수필로서의 특징(갈래, 수필문학)

상소문은 앞서 말했듯이 공문서적인 글이다. 때문에 딱딱하고 형식적인 글쓰기 방식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그 글이 문학적 향취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소문에는 다른 갈래의 수필들과는 전혀 다른 문학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상소문에 문학적인 향취에 대해 제대로 알기위해서 중요한 점은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는 상소문이 정치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다른 수필과는 다르게 상소문은 글쓴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그 글이 매우 논리적이다. 또한 굉장히 형식적이며 예절을 정확하게 지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글쓴이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상소문을 사용하였다. 상소문의 내용은 국가 중대사에 대한 건의, 인물을 평가하여 추천 또는 비판, 왕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하게 있었다. 선비들은 상소문을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 불의에 대해 항거하였으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였다. 때문에 상소문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도층인 선비들이 백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출구였기에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5) 상소문의 글의 짜임

우리속담 중 “‘다르고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가 듣는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소문은 앞서 말했듯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기에 예절을 철저하게 지키며 법에 어긋나는 일을 비판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글을 써야하기에 문장력은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많이 인용한 방식이 바로 옛 왕들을 예로 들어 인금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전례를 통해 왕에게 말하기에 임금의 노여움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상소문이 어떤 형식으로 글이 쓰였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논지를 구체화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설득적인 글쓰기를 할 때 선결론 후논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소문은 이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상소문은 선논거 후결론 식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글의 독자가 왕이라는 특이점이 작용한 것이다. 자칫하면 가르치는 형식으로 보이는 선결론 후논거 식의 글쓰기보다는 선논거 후결론 식의 글쓰기를 사용하여 왕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단도직입적인 주장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을 내지 완곡한 내용 전개로 왕에게 공손함을 보이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재를 활용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전제를 두면 글은 목적은 흐트러져 버린다. 또한 전제를 두지 않는다면 독자에게 반박의 여지를 줄 가능성을 야기 할 수 있다. 때문에 상소문을 쓸 때 그에 대한 전제의 사용은 글쓴이에겐 자신의 주장이 엇나가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이었고 독자인 왕에게는 그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세 번째, 유교적인 논거를 활용한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세계관 내지는 중국 중심적인 중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때문에 논거를 활용할 때 주로 유교적인 논거를 사용한다. 우리도 흔히 논평이나 사설을 쓸 때 그 분야의 권위자에 말을 인용한다. 조선시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교적 논거의 활용은 글쓴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독자인 왕에게는 자연스럽게 복종의 무엇으로 작용한다.

6) ‘윤춘년 상소의 글쓰기 특징

앞서 말한 상소의 글의 짜임과 비슷한 특징은 윤춘년 상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예절과 최상의 존경표현이다. 윤춘년은 신이 삼가 살피건대등의 말로 시작하여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로 말을 끝맺는다. 형식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문장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이를 지킴으로써 왕에게 최고의 존경의 표현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는˞대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왕의 지위를 명확히 하면서 왕에게 예절을 갗출 뿐만 아니라 문정황후와 인종에게 대한 예를 지켜야 함을 전제하며 자신의 논거에 벗어나지 않도록 유지한다.

두 번째는 유교적 질서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의 삽입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도 부모를 능욕하는 사람을 보면 보복할 바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대왕대비는 만세에 여희의 이름을 입었사오니국사에서도 혹 갖추어 기록하지 못하여 중종대왕은 길이 진 헌공이 되고 대왕대비는 길이 여희가 될 것이며의 두 구절은 유교적인 질서에 어긋났던 진헌공의 사례를 대입한 것이다. 윤춘년은 이를 대입함으로 자신의 주장의 힘을 실음과 동시에 왕에게 도덕적 규범을 상기시켜 윤원로가 죄에 대해 동의하게 한다.

 

6) 나의 감상과 모작

왜 이시대의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유의 천재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들으면서 억눌려진 권위에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지난학기부터 나는 복수전공으로 관광경영학과 강의를 수강하였다. 지난학기는 관광경영학에 대해 알기위해 수강을 한 것이라면 이번 학기는 보다 깊게 공부하고자하여 높은 학년에 강의를 수강하였다, 그런데 한 학기동안 국어국문학과아니 인문과학대학이라고 한 교수에게 굉장히 서러움을 받았다. 강의내용을 말하면서 갑자기 인문과학대학생들은 논리적이 못하다고 비약하거나 인문과학대학생들은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평을 했다. 인문과학대학에서는 발표를 하지 않는다.’라는 단정적인 말에 심각한 분노를 느꼈음에도 교수라는 직책의 권위 앞에 예를 지켜야하기에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상소문은 굉장히 유용한 글인 것 같다. 제대로 글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칭찬하는 글이지만 본질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족함에 대해 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번 배운 상소문을 바탕으로 나의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교수님께 호소하는 글로 한번 모작해보고자 한다.

상소(張恩晋 上疎)

소인이 삼가 살피건대, 스승께서는 고전문학의 대가이시오. 순천향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서 인문학의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세간에서 최근 실용학을 중시하고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이 당연시해지고 심지어는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으며, 사람마다 다 함께 베어야 할 것이나 시끄러운 논의가 오히려 불쾌감이 있는 것은, 나라의 인심이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이 생각이 이러 하온데 어찌 지식을 추구한 자가 다르리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인문학은 모든 실용학문에 근간이자 뿌리가 되는 것은 배운 자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런데 그 근간에 대해 부정하고 비약하는 자가 신과 신의 지기를 핍박하며 업신여기니, 이가 반복될까 두려워 차마 넘기지 못하고 아뢰옵니다.

소인이 삼가 살피건대, 인문학은 그 시작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대한 탐구에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생각을 시작한 순간부터 따라온 것이 인문학이 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등 삶의 기초를 담고 있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를 넘긴다면 필요한 것, 활용가능 한 것에 대해 어찌 알 수 있으며 이를 연구한다 할 수 있사옵니까. 이는 어버이를 알지 못하고 난 자식과 같으며 그 뿌리를 알지 못하는 민족과 같사오니, 어찌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가 그 겉에 있는 것에 말한다고 한들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겠습니까. 뿐만 아니오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와 관계된 이유 인지 소인은 잘 알지 못하겠으나 종종 책과 다른 내용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 이에 관해 다른 학과의 학생임을 내세워 간언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리겠습니까. 제자는 스승에게 질문한 권리가 있고 이를 답하여 형성되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옵니다. 그럼에도 스승이 제자의 질문은 받지 않으니 이를 어찌 스승이라 하겠습니까. 부디 스승께선 제자의 울분을 부정한 것이라 여기지 마옵시고 들어주시옵소서.

자고로 제자가 스승에게 지켜야 할 가 있다면 스승도 제자에게 지켜야 할 가 있습니다. 때문에 공자께서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이라 하셨고 제자인 안회자로를 통해 여러 깨달은 바가 많으십니다. 하물며 교수된 자로써 옛 성현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고 제자를 존중하지 않으니 어찌 가르치는 자의 예를 다한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존중받지 못한 배우는 자에게 제자의 덕목만을 강요한다면 어찌 그것이 옳은 일이라 말하겠사옵니까. 스승께선 부디 이를 염두하시여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으로만 보시지 마옵고 후대를 생각해 올리는 간언으로 받아주소서.

지난 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공평하고 사사로움 없이 양시양비론을 이끌어 갔음에도 다른 이는 이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그를 평하기론 공평무사를 추구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이로 기억하옵니다. 소인은 사제 간의 정을 뒤로하고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자로써 그 도리를 다하고자하니, 진실로 다른 날 반드시 스승의 화가 미칠 것을 알고 있으나, 소인의 한 몸이 족히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스승께서는 소인으로 하여금 백대한 후에 후배들에게 지언의 도리에의 이름을 얻지 말게 하옵소서.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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