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필의 이해

尹春年 上疎(윤춘년 상소)

 

1) ‘상소?

윤춘년의 상소에 말하기에 앞서 상소, 올리다 상()자에 트다. 통하다 소()자를 사용하는 상소문에 대하서 알아야 한다. 상소문은 임금과 신하가 말을 통하게 하는 하나의 글 형식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글쓰기로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문서와 비슷하다. 상소의 기원은 보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나라 이전에 상서(上書)라 불리고 진나라 때는 주()라 하고, ()나라에 이르러서는 장(·(()로 세분하였다. 그 이후 주의(奏議주소(奏疏) 등의 이름을 붙여졌고 이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상소와 상주가 되었다,

상주와 상소는 두 경우 모두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상소는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청하는 글이고, 상주는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건의사항을 적은 글이다, 즉 상소는 일종의 호소문이라면 상주는 일종의 청유문이나 제안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최고 권력자인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충··의를 굉장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효 그리고 충이라 불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소는 이런 조선시대 사회에서 일종의 위계질서를 위배할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득권층인 양반들은 이 문제를 고서의 인물들에 대한 행동을 비유하거나 고서를 인용해 해결하였다. 유교의 중요경전인 사서삼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앞선 전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왕의 행동을 비판했다.

 

2) ‘윤춘년은 누구인가?

윤춘년(1514 ~ 156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창주(滄洲). 계겸(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안인(安仁)이다. 조선 중기 문신 학자로 대표적인 글로는 학음고學音稿가 있다.

1534(중종29) 생원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이후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다가 1545(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에게 가담하여 대윤일파의 제거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을 숙청하였다. 다음해에는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 제거에 윤원형의 독주체재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계기로 윤원형의 총애를 받게 되고 이후 급속히 출세하게 하여 이조정랑·장령·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됐다. 그러나 2년 뒤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공박하지 못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1558년 동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565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윤원형이 실각되자 파직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사관은 그를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대학자로 자처하는 등 공명심은 많았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였다고 하며 청백리로 알려지기도 하다라 기록했다.

인간의 실수는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정당싸움은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현실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왕과 신하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왕과 정당과 정당의 삼파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춘년은 이러한 당파싸움의 절정기인 중종과 명종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우리나라는 선비들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이란 의미를 갖는 사화가 총 4번에 걸쳐 존재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이중 두 번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났으며 나머지 두 번은 중종과 명종시대에 일어났다. 특히 윤춘년의 상소문은 역사상으로 을사사화의 시발점으로 뽑힌다. 이러한 배경으로 윤춘년이 살아간 시대를 바라보면 그는 제대로 당파에 붙지 못하면 죽으며, 남의 당파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시대에 살아갔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윤춘년을 바라보면 그의 글은 절대 비굴한 글쓰기만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글은 이간질을 위한 글이라고 보기보다는 그의 글은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3)‘윤춘년 상소내용

명종에게 윤원로를 탄핵할 것을 요구하는 글이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 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문정황후가 인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돌았다. 윤춘년은 이를 윤임과 윤원로의 거짓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죄를 물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여기서 윤원로는 윤춘년이 담고 있는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의 형이다. 당시 정세를 보면 당파는 대윤과 소윤으로 또 소윤은 윤원로와 윤원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때문에 대윤이 지지하던 인종이 죽었음에도 소윤이 대윤을 축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소윤의 구심점을 윤원형에게 몰아주며 대윤을 축출하는 시발점을 마련해줬다.

 

4) 수필로서의 특징(갈래, 수필문학)

상소문은 앞서 말했듯이 공문서적인 글이다. 때문에 딱딱하고 형식적인 글쓰기 방식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그 글이 문학적 향취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소문에는 다른 갈래의 수필들과는 전혀 다른 문학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상소문에 문학적인 향취에 대해 제대로 알기위해서 중요한 점은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는 상소문이 정치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다른 수필과는 다르게 상소문은 글쓴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그 글이 매우 논리적이다. 또한 굉장히 형식적이며 예절을 정확하게 지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글쓴이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상소문을 사용하였다. 상소문의 내용은 국가 중대사에 대한 건의, 인물을 평가하여 추천 또는 비판, 왕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하게 있었다. 선비들은 상소문을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 불의에 대해 항거하였으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였다. 때문에 상소문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도층인 선비들이 백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출구였기에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5) 상소문의 글의 짜임

우리속담 중 “‘다르고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가 듣는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소문은 앞서 말했듯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기에 예절을 철저하게 지키며 법에 어긋나는 일을 비판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글을 써야하기에 문장력은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많이 인용한 방식이 바로 옛 왕들을 예로 들어 인금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전례를 통해 왕에게 말하기에 임금의 노여움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상소문이 어떤 형식으로 글이 쓰였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논지를 구체화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설득적인 글쓰기를 할 때 선결론 후논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소문은 이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상소문은 선논거 후결론 식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글의 독자가 왕이라는 특이점이 작용한 것이다. 자칫하면 가르치는 형식으로 보이는 선결론 후논거 식의 글쓰기보다는 선논거 후결론 식의 글쓰기를 사용하여 왕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단도직입적인 주장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을 내지 완곡한 내용 전개로 왕에게 공손함을 보이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재를 활용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전제를 두면 글은 목적은 흐트러져 버린다. 또한 전제를 두지 않는다면 독자에게 반박의 여지를 줄 가능성을 야기 할 수 있다. 때문에 상소문을 쓸 때 그에 대한 전제의 사용은 글쓴이에겐 자신의 주장이 엇나가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이었고 독자인 왕에게는 그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세 번째, 유교적인 논거를 활용한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세계관 내지는 중국 중심적인 중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때문에 논거를 활용할 때 주로 유교적인 논거를 사용한다. 우리도 흔히 논평이나 사설을 쓸 때 그 분야의 권위자에 말을 인용한다. 조선시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교적 논거의 활용은 글쓴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독자인 왕에게는 자연스럽게 복종의 무엇으로 작용한다.

6) ‘윤춘년 상소의 글쓰기 특징

앞서 말한 상소의 글의 짜임과 비슷한 특징은 윤춘년 상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예절과 최상의 존경표현이다. 윤춘년은 신이 삼가 살피건대등의 말로 시작하여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로 말을 끝맺는다. 형식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문장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이를 지킴으로써 왕에게 최고의 존경의 표현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는˞대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왕의 지위를 명확히 하면서 왕에게 예절을 갗출 뿐만 아니라 문정황후와 인종에게 대한 예를 지켜야 함을 전제하며 자신의 논거에 벗어나지 않도록 유지한다.

두 번째는 유교적 질서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의 삽입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도 부모를 능욕하는 사람을 보면 보복할 바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대왕대비는 만세에 여희의 이름을 입었사오니국사에서도 혹 갖추어 기록하지 못하여 중종대왕은 길이 진 헌공이 되고 대왕대비는 길이 여희가 될 것이며의 두 구절은 유교적인 질서에 어긋났던 진헌공의 사례를 대입한 것이다. 윤춘년은 이를 대입함으로 자신의 주장의 힘을 실음과 동시에 왕에게 도덕적 규범을 상기시켜 윤원로가 죄에 대해 동의하게 한다.

 

6) 나의 감상과 모작

왜 이시대의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유의 천재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들으면서 억눌려진 권위에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지난학기부터 나는 복수전공으로 관광경영학과 강의를 수강하였다. 지난학기는 관광경영학에 대해 알기위해 수강을 한 것이라면 이번 학기는 보다 깊게 공부하고자하여 높은 학년에 강의를 수강하였다, 그런데 한 학기동안 국어국문학과아니 인문과학대학이라고 한 교수에게 굉장히 서러움을 받았다. 강의내용을 말하면서 갑자기 인문과학대학생들은 논리적이 못하다고 비약하거나 인문과학대학생들은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평을 했다. 인문과학대학에서는 발표를 하지 않는다.’라는 단정적인 말에 심각한 분노를 느꼈음에도 교수라는 직책의 권위 앞에 예를 지켜야하기에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상소문은 굉장히 유용한 글인 것 같다. 제대로 글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칭찬하는 글이지만 본질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족함에 대해 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번 배운 상소문을 바탕으로 나의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교수님께 호소하는 글로 한번 모작해보고자 한다.

상소(張恩晋 上疎)

소인이 삼가 살피건대, 스승께서는 고전문학의 대가이시오. 순천향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서 인문학의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세간에서 최근 실용학을 중시하고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이 당연시해지고 심지어는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으며, 사람마다 다 함께 베어야 할 것이나 시끄러운 논의가 오히려 불쾌감이 있는 것은, 나라의 인심이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이 생각이 이러 하온데 어찌 지식을 추구한 자가 다르리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인문학은 모든 실용학문에 근간이자 뿌리가 되는 것은 배운 자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런데 그 근간에 대해 부정하고 비약하는 자가 신과 신의 지기를 핍박하며 업신여기니, 이가 반복될까 두려워 차마 넘기지 못하고 아뢰옵니다.

소인이 삼가 살피건대, 인문학은 그 시작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대한 탐구에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생각을 시작한 순간부터 따라온 것이 인문학이 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등 삶의 기초를 담고 있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를 넘긴다면 필요한 것, 활용가능 한 것에 대해 어찌 알 수 있으며 이를 연구한다 할 수 있사옵니까. 이는 어버이를 알지 못하고 난 자식과 같으며 그 뿌리를 알지 못하는 민족과 같사오니, 어찌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가 그 겉에 있는 것에 말한다고 한들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겠습니까. 뿐만 아니오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와 관계된 이유 인지 소인은 잘 알지 못하겠으나 종종 책과 다른 내용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 이에 관해 다른 학과의 학생임을 내세워 간언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리겠습니까. 제자는 스승에게 질문한 권리가 있고 이를 답하여 형성되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옵니다. 그럼에도 스승이 제자의 질문은 받지 않으니 이를 어찌 스승이라 하겠습니까. 부디 스승께선 제자의 울분을 부정한 것이라 여기지 마옵시고 들어주시옵소서.

자고로 제자가 스승에게 지켜야 할 가 있다면 스승도 제자에게 지켜야 할 가 있습니다. 때문에 공자께서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이라 하셨고 제자인 안회자로를 통해 여러 깨달은 바가 많으십니다. 하물며 교수된 자로써 옛 성현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고 제자를 존중하지 않으니 어찌 가르치는 자의 예를 다한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존중받지 못한 배우는 자에게 제자의 덕목만을 강요한다면 어찌 그것이 옳은 일이라 말하겠사옵니까. 스승께선 부디 이를 염두하시여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으로만 보시지 마옵고 후대를 생각해 올리는 간언으로 받아주소서.

지난 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공평하고 사사로움 없이 양시양비론을 이끌어 갔음에도 다른 이는 이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그를 평하기론 공평무사를 추구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이로 기억하옵니다. 소인은 사제 간의 정을 뒤로하고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자로써 그 도리를 다하고자하니, 진실로 다른 날 반드시 스승의 화가 미칠 것을 알고 있으나, 소인의 한 몸이 족히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스승께서는 소인으로 하여금 백대한 후에 후배들에게 지언의 도리에의 이름을 얻지 말게 하옵소서.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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